살아가는 이야기
난중일기에 적힌 명량해전 본문
■난중일기
▶1597년 신유일 8월 3일 (음 9월 13일)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그것이 곧 겸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하동읍 두곡리)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자정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화개면 탑리)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갔다고 했다.
손인필ㆍ손응남이 와서 보고, 올감[早枾]을 가져왔다.
▶1597년 병자일 8월 18일 (음 9월 28일)
맑다.
회령포(대덕읍 회진리)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삼고서 와 보지 않았다.
관사에서 잤다. 전선이라곤 다만 열 척이 있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병선(兵船)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전선을 거북배로 꾸며서 군세를 돋구도록 하라”고 하고, 또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소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굳게 약속했다.
▶1597년 을유일 8월 27일 (음 10월 7일)
맑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1597년 병술일 8월 28일 (음 10월 8일)
맑다.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1597년 경인일 9월 2일 (음 10월 12일)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1597년 을미일 9월 7일 (음 10월 17일)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다섯 척 가운데 열 세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각 배들에게 엄중히 일러 경계하였다.
오후 네 시쯤에 적선 열 세 척이 곧장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쫓아 먼 바다에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흐르므로 항해할 수가 없어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오늘밤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아 각 배에 경계태세를 갖추라고 하였다.
밤 열 시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야습해 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포를 쏘았다.
그랬더니 적이 침범할 수 없음을 알고 자정에 물러갔다.
▶1597년 임인일 9월 14일 (음 10월 24일)
맑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미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데 김중걸이, 이달 6일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 ‘조선 수군 10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겠다.
그리하여 여러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두 몰살한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1597년 계묘일 9월 15일 (음 10월 25일)
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지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1597년 갑진일 9월 16일 (음 10월 26일)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하여 옵니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이 중과부적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먼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포ㆍ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과 우뢰 같았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수가 없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을 쏘아라”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으면서 관망하고 진격하지 않았다.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중군장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차로 멀리 물러날 것이요, 적선이 점점 육박해 오면 일은 아주 낭패다. 곧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기를 내리고 또 초요기를 올리니,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내가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이르되,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고 하니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다시 김응함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세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어지러이 싸우다가 힘이 거의 다하게 되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몽땅 다 엎어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았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 온자이다. 내 배 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뱃머리)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린다.
이때 우리의 여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겼다
▶1597년 을사일 9월 17일 (음 10월 27일)
맑다.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대첩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나주진사 임선ㆍ임환ㆍ임업 등이 와서 봤다.
퍼온 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8041142401&code=96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