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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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어느 작가의 글

우균 2011. 2. 15. 13:26
최근 일어난 슬픈 사건 때문에 논란이 된 글이다. 원 글을 읽다가 계속 트위터 API를 설치하라는 메시지가 떠서 너무 방해가 되어 여기 캡처해 둔다. 최근 이 작가가 트위터 절필을 선언했다고 한다. 떠난 사람이나 남겨진 사람이나 너무 슬프게 하는 현실이다. 이 글이 그가 의미했던 기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퍼온 글 == (원 글: http://kimyoungha.com/tc/152)

나는 최고은의 선생이었다.

이 첫 문장을 쓰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고은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설이었다. 고은이와 함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내게 이메일로 부음을 알려왔다. 그들은 비통해하고 있었다. 누구도 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메일에서 나는 애써 감춘 비난의 뉘앙스를 읽었다. ‘고은이가 그렇게 될 때까지 선생님은 뭘 하셨나요?’ 또한 자책의 마음을 동시에 읽었다. 함께 수업을 듣고 영화를 만들고 밥을 먹었던 그들로서는 그런 비참한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 컴퓨터에는 고은이가 쓴 글들이 들어있다. 부음을 들은 날 밤에 나는 그녀가 과제로 낸 글들을 찾아 다시 읽었다. 맥락이 달라져서일까. 모든 게 달라보였다. 글 속에서 고은이는 어느 가난한, 가스요금도 못 내는 시나리오 작가가 맞고로 떼돈을 버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놓고 있기도 하고, 가슴이 물리적으로 너무 아파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했다. 죽은 제자의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 읽었다. 그리고 추모행사를 준비한다는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 마음들을 잘 추스르라고 말했다.

고은이는 두 학기 동안 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밝고 붙임성이 있는, 그러나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있는 친구였다.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왔던 터라 이미 이십대 후반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교수였는데, 전공이 서사창작인지라 영상원 학생들도 많이 들었다. 한예종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온다. 영상원도 마찬가지다. 영상원의 입시에는 글쓰기도 포함되어 있다. 영상으로 학생을 뽑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글을 통해 학생의 재능을 가늠하자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인기가 높고 지원자들이 몰려들면서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영상원에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이 본의 아니게 늘어난 것이다.

고은이도 그런 학생 중의 하나였다.

꿈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었지만 문학도 좋아했다. 글도 뚝딱뚝딱 잘 썼다. 유머가 있었고 비애가 있었고 통찰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의 글도 만만치 않게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데 왜 영화들을 하려고 하니? 따뜻한 방에서 별로 돈 안 들이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때 슬며시 웃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라는 잘나가는 장르를 질투하는 소설가의 시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고은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명은 내 말을 들었다. 그녀는 영화를 포기하고(자기 말로는 영화에 원래 큰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연극원으로 과를 옮겼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반 년 후에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그녀가 김사과다.  

고은이는 남았다. 그리고 단편을 만들었다. 영상원 영화과에서는 누구나 단편을 찍어야한다. 고은이도 찍었다. 그리고 영화제에 가서 상도 받았다. 그게 <격정소나타>다.

그 다음 해인가.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 제작자가 시나리오를 고칠 작가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고은이를 소개시켜줬다. 그러나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제작자는 고은이가 제시한 액수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그 삼분의 일만 줘도 하겠다는 애들이 널렸어요.” 라고 제작자는 말했다. 지금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고은이가 제시한 금액은 한 재능있는 작가의 시간을 하염없이 저당잡을만한 큰 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내가 얼마인지 말하면 아마 다들 놀랄 것이다. 그리고 실은 그 절반밖에 못 받고 대부분의 일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 더 놀랄 것이다). 내가 고은이는 그만한 재능이 있으니 믿고 맡겨보라고 하자 제작자는 이렇게 말했다.

“김작가님이 영화판을 모르셔서 그래요.”

맞다. 나는 영화판을 모른다. 어떻게 지금껏 잘 돌아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머리로는 납득이 돼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전혀 인연이 없던 판은 아니어서 ‘전혀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서 있는 바닥 아래에 갤리선의 노잡이들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영화계는 화려한만큼 그늘도 깊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작가들의 가장 큰 고통은 만족감의 부재다. 소설은 자기의 의지가 굳기만 하다면 끝은 낼 수 있다. 그것을 주변에 돌려 읽힐 수도 있고 잘 제본해서 책꽂이에 꽂아놓을 수도 있고 자비로 출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그 자체로는 완성품이 아니다. 운이 좋은 몇 편의 시나리오만이 수많은 단계를 거쳐 비로소 영화가 된다. 많게는 수십 차례를, 몇 년 동안 고친 시나리오들이 영화화 무산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간다. 게다가 그 바닥은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남성 시나리오 작가는 감독을 겸업하는 대안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여성 작가들은 그 대안을 섣불리 선택하지 못한다.  

고은이가 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신문에 기사가 떴다. 난리가 났다. 온 세상이 말을 쏟아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그렇게 가장 힘든 시간은 지나갔다. 부끄러웠다. 내가 고은이의 선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추문이다. 김현은 오래 전에 썼다. “문학은 억압과 억압에 의해 야기된 불행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드러내어 추문으로 만든다.”고. 고은이 사건은 문학이 그것을 드러내기도 전에 먼저 추문이 되었다. 지금 나는 그 추문을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그것을 앞질러 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 추문과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소 엉뚱한 사건 때문이다. 지난 1월 1일 신춘문예 발표일을 맞아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 있었다. 그 글에 평론가 소조님이 반박의 글을 보내왔고 그에 따라 나도 또 글을 쓰고 이러면서 글타래가 이어졌다. 주제는 작가지망생들이 어떻게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예술가로 살아갈 것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설이 지날 무렵, 소조님의 글이 올라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고은이의 일로 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예술가 지망생이 이 엄혹한 예술계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재능을 꽃피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던 와중에, 고은이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고은이가 쓴 글을 내가 진행하는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낭독할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무능해서, 글을 잘 못 써서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과제 폴더를 열어 그녀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편은 이름을 가리고 내놓는다면 기성작가가 썼다고 해도 믿을 글이었다. 그래, 팟캐스트의 제목은 <무명작가 최고은>이라고 하자. 그러나 나는 그 팟캐스트를 녹음하지 못했다. 그랬다.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소리내어 읽을 수가 없었다. 마이크를 치웠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기사가 떴다. 그날도 어디에든 뭔가 한 마디 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소조님이 트위터로 올린 글이 갑자기 화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트위터는 140자라는 한계가 있다. 이어 써도 읽는 사람은 잘 이어 읽지 않는다. 오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이후의 소조님의 대응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제는 140자로도 오해없이 전달이 가능하다. 채근담 류의 공자님 말씀, 자기계발서 카피 같은 글들이 그렇다. 그런데 어떤 주제는 독자를 설득하는데 최소 2000자의 공간이 필요하다. 또 어떤 민감한 주제는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예컨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같은 책의 문제의식을 140자로 전달할 수는 없다. 과학의 역사가 점진적이 아닌 계단식으로, 어떤 충격적 기점들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변화해왔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설득하려는 주제가 그 미디어에 맞는지를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여성작가에 대한 그의 트윗이 문제가 되었을 때, 소조님은 “맥락을 살펴달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맥락을 잘 살펴야할 사람은 평범한 독자라기보다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 중에서도 비평가여야 마땅하다. 비평가야말로 타인이 써놓은 글, 예컨대 소설 같은 복잡한 글을 숨겨진 컨텍스트까지도 섬세하게 살피며 읽어야하는 직업이 아닌가.

독자에게는 숨겨진 맥락을 살필 것을 주문하면서 소조님 자신은 더 큰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날은 아침에 한겨레신문 기사를 필두로 온 포털에 글들이 깔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비통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모두들 이 추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더 일찍 그 비운의 젊은 예술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감독한 단편영화와 인터뷰 영상들을 찾아보며 한 재능이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를 죄스럽게 훔쳐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날 소조님이 잃은 것은 신망이라기보다는 기대였다고 생각한다. 연예저널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낚여 들이닥친 이들은 차치하자. 그들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을 빼고도 그날 많은 이들은 소조님께 실망했던 것이고 그 실망은 이 아웃사이더 비평가가 혹시 공감의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성질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조님은 거기에 더해 “내가 공격당한 배경에는 최고은씨의 죽음이 있는 같은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나만큼 문화계(문학계) 불공정함을 문제삼은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지만 이것 역시 독자들에게 ‘소조님의 인생'이라는 긴 맥락까지 살펴달라는 과한 주문일 뿐이다. 자신이 약자이거나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그 어떤 말도 용납된다는 발상은 다소 위험하다. 다층적인 사회에서는 경우에 따라 누구든 상대적으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반응은 자기반성이나 내성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평론가가 내성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논리가 무너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후에 말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소조님이 문제의 트윗을 방어하면서 이 모든 일은 ‘김영하와의 논쟁'과 관련이 있다고 거듭 말하는 바람에 논쟁의 성격도 이상해져 버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던 독자들마저 이 논쟁의 귀추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논쟁을 이어가자면 나는 고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내게 보낸 소조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고은이 사건이 있기 전에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적는다. 아무래도 지금 적고 지나가지 않으면 영영 못 쓸 것 같아서이다. 이제 소조님이 쓴 글을 보자.

이 글은 이상하다. 처음 볼 때부터 어리둥절했다. 다시 읽어도 그렇다. 소조님의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잘 나가다가 갑자기 마지막인 4장에 이르러 돌연 엉뚱한 곳으로 초월해버린다. 예를 들어 다음 문단을 보자.

“김영하님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뀔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세계와 씨름을 해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겹따옴표를 쳐놨기 때문에 저 문장은 마치 내가 직접 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원래의 내 글은 “예술가 개인은 시장의 규모도, 진입장벽의 높이도, 정치 제도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분간'이라는 부사이며 이 글이 작가지망생들, 즉,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는 보내는 글임을 감안할 때, ‘당분간'이라는 부사는 더욱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세계를 일단 변화시키고 보라'는 식의 충고는 무책임하다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들다'는 그 다음 문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140자로 설득할 수 있는 주제가 있고 한 권의 책이 필요한 주제가 있는데 저 문장이야말로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한 사람이 담배를 끊는 것이 전 국민이 담배를 끊게 하는 것보다 쉽다. 나 한 사람이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새해 결심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전 국민이 책을 많이 읽게 만들려면 엄청난 예산과 캠페인, 교육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상식을 설득력 있게 뒤집으려면, 토마스 쿤처럼 한 권의 책을 써야한다. 그런데 소조님은 갑자기 ‘왜냐하면'으로 앞 문장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왜냐하면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뀔 뿐입니다'라고 써나간다. 그가 ‘인간은 환경과 교육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빈서판이라는 식의 환경결정론'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면 이 문장은 접수하기가 어렵다. 우선 나부터가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뀌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 무슨 단순한 결정론이란 말인가.

그런데 소조님이 이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장의 연쇄로 결론격인 4장을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도 논리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까운 글들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들을 통해 소조님은 ‘나는 그냥 선언을 해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만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라는 문장이 또한 그렇다. 소조님의 문체는 잠언과도 같은 선언을 던진 후에, 바로 ‘왜냐하면'이나 ‘그렇다면'으로 그 앞 문장을 기정사실화한다. 아니나다를까, ‘그렇다면 이런 ‘제자리걸음'이야말로 문학(예술)의 가장 큰 적이 아닐까요?”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나로서는 거의 모든 문장에 고개를 가로젓게 만드는 이 4장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반론을 할 의지를 잃고 만다. 개인을 바꾸는 것이 세계를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명제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지난한 철학적 토론을 벌여야한다. “모든 예술가는 혁명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예술사 전반을 검토해야한다. 이런 글들로 이루어진 성급한 ‘선언문'을 가지고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글이 아니었다. 내 세번째 글을 읽어보면 작가인 내가 소위 ‘문학어'를 버리고 비평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작가로서 익숙하고 안온한 ‘문학어'의 세계에서 걸어 나와 스티븐 래빗이나 라즐로 바라바시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학자의 언어로 말한 것은 평론가인 소조님에게 나름의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런데 소조님은  갑자기 시의 언어, 선언의 언어로 퇴각해버렸다. 나는 학자나 평론가가 엄정한 언어를 쓰지 않으면 신뢰를 못한다.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놀라움이라면 평론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독자를 차분히 설득하는 섬세한 논리적 설득력이다. 작가가 평론을 쓰든, 평론가가 소설을 쓰든 마찬가지다.

지난 글에서 나는 현실의 높고 잔인한 벽에 직면한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그 벽에 가서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고 예술가를 하나의 대안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라고, 예술을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운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학자의 언어로 논증과 팩트를 들어 말했다. 그러나 소조님이 보내온 이 게으른 글을 보니 뺨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논증도 없고 제대로된 반박도 없는, 감정적 수사로 가득한 선동에 가까운 글이 소조님의 진심이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선언을 하고 싶다면 나를 걸치지 않고 바로 하면 된다. 소조님이 늘 얘기하는 ‘새로운 (문학) 제도’를 창안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잘 만들면 작가들이 모일 것이다. 4.19 세대들이 그렇게 했듯이. 그러나 섣부른 선언 이전에 뜻을 함께 하는 작가와 비평가를 먼저 규합했다. 그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문학은 개인적인 예술이다. 아직도 전 세계의 소설가들은 혼자 쓴다. 늙어죽을 때까지도 혼자  쓴다. 영화와 TV 드라마, 애니메이션까지 서사창작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협업이 이루어지지만 소설만은 예외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은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한다. 문단이라는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제도는 보기보다 간단하지가 않다. 프로야구처럼 커미셔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전음악계처럼 대학에서 일정한 훈련을 거친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도 아니다. 장정일처럼 중졸에 소년원 출신인 작가도 있는가하면 원래는 극작과에서 희곡을 쓰다가 어느 재단에서 하는 대학생 공모에 소설을 보내면서 작가가 된 김애란 같은 이도 있다. 진입하는 경로도 다양하고 인적 구성도 단일하지 않고 지도부도 없다. 몇 개의 출판사가 잘 나가는 작가들을 독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 작가들이 거기 전속인 것도 아니다. 카르텔을 형성해 새로운 작가들의 진입을 막고 있지도 않다. 문창과 출신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소조님의 지난 10년간의 문단 공격이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단이 강고하게 단결해 소조라는 이를 왕따시킨 탓이라기보다는 아픈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조님이 이번에 쓴 글과 같은 글을 계속 쓴다면 문단은 별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언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개인들의 느슨한 리좀적 연대로, 허술한 언어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비약이 잘 허용되지 않는 비평가들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문학사와 문학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4.19 세대 비평가들의 글을 보라. 그들의 기획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 가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백낙청, 김병익, 김현, 김우창 등의 글에는 섬세하고 치밀한 논리와 사유가 있다.  

그리고 소조님은 세계를 바꿈으로서 비로소 자기를 바꾸는 데 성공한 작가들에 대해 친절하게 예를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소조님의 글 3장에 등장하는 플로베르는 그런 작가가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그에 대해 몰랐던 면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플로베르를 제외하고라도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조님이 예로 든 그런 영웅적인 작가들의 면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내가 아는 작가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과 싸우다 “결과적으로 혹은 어쩌다보니” 세상을 바꾼 사람들 뿐이다. 그들이 바꾸었다는 세상도 현실의 세계라기보다는 문학적 지형이라는 일종의 가상세계였다. 그것이 쿤데라가 말하는 ‘개개의 작품은 세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작품들에 대응한다'는 테제일 것이다.

문학의 흥미로운 점은 그것을 둘러싼 바로 그런 무수한 아이러니들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도박빚을 갚기 위해 쓴 소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기도 하고, 단지 한 여자를 미혹하기 위해 쓴 연시가 대대로 애송되기도 한다. 도둑놈, 건달, 망명객, 마약중독자, 바람둥이, 정신병자, 살인자가 걸작을 쓰는가하면 가장 좋은 대학을 나온 최고의 인재가 범작만 쓰다 인생을 종치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개혁하겠다는 꿈을 품고 소설을 썼고 그 결과 <안나 카레니나>의 상당 부분은 작가의 정치적 견해와 계몽적 사상으로 점철돼 있지만, 오늘날 모든 독자와 비평가가 사랑하는 것은 톨스토이가 힘을 주었던 그 장광설이 아니라 “그 여자는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작가 자신마저 진절머리를 냈던 안나 카레니나의 혼란스런 행동과 심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의도와 결과가 모든 분야에서 어긋나는 장이다. 선의를 투입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고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는다고 대작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술에 취해 휘갈겼다고 다 쓰레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겨냥한 지점과 전혀 다른 지점에서 절창이 나오기도 하며, 작가가 실패작이라고 버린 소설을 후대에서는 걸작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또한 한 세대가 입이 마르게 고평했던 소설이 작가가 죽자마자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지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토록 이상한 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원칙도 없이 일어나는 문학이라는 행성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알아나가야한다. 한국문학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 세계 문학계가 이렇게 느슨한 개인들이 종횡으로 얽히면서 서로 경쟁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즉, 문학계라는 곳은 소조님이 몇 줄로 간단하게 ‘세계를 바꾸면 된다'고 말한다고 바뀌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문학계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있되,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해결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미학에는 아직 해명하지 못한 질문들이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도대체 어떤 작품이 궁극적으로 정전이 되는가, 라든가,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이고 어떤 작가가 나쁜 작가인가, 젊은 날에 좋은 작품을 쓰던 작가가 늙어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젊은 날에는 별볼일 없던 작가가 늙어서 갑자기 걸작을 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기준은 왜 자꾸 바뀌는가, 그런데도 몇 천 년 동안 정전으로 내려오는 <오딧세이> 같은 작품은 도대체 그 안에 어떤 요소가 있기에 그러한가, 그런 걸작들을 쓰려는 작가가 준비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연애와 알코올은 작품의 창작에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인간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먹고 살기 어려운 예술에 몸을 던지는가, 광기는 예술의 본질인가 아니면 한때의 유행인가, 남성/여성 호르몬의 분비와 창작의 양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작가의 도덕적 선의가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가, 전세계에는 단 하나의 ‘문학'이 있는가 아니면 나라마다 다른 일종의 ‘리그'가 있는가. 이밖에도 무수한 미학적 질문들이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는, 그리고 현재 작품을 써나가고 있는 현업 작가들은 이 모든 질문들과 결국은 맨몸으로 대결하게 된다. 그러니 간단하게 뭔가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화려한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은 ‘나는 과연 작품을 써낼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 ‘어떤 작품이 과연 좋은 작품인가'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간단없이 엄숙한 삶의 시련을 겪어야한다. 생계와 결혼, 육아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널려있다. 이 문제들을 간과한다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술가도 인간이고 결국은 죽는다는 것. 그것은 예술가를 성숙하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하고 조급하게도 하고 모든 것을 문득 긍정하게도 만든다. 어떤 역할을 하든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그 어떤 손쉬운 해결책에도 현혹되지 말고 냉철하게 현실을 살펴야한다. 때로는 자신을 격려하고 자기 내면의 어린이/괴물을 발견해 그것으로 예술활동의 자양분으로 삼으면서도 현실감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쉽게 병든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얘기 하나만 할까 한다. 나보다 어려운 작가들이 부지기수인데 아무래도 엄살 같아서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등단을 하자마자 나는 결심을 하나 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지켰다. 아이를 양육할 돈으로 더 오래 작가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처럼은 아니겠지만 내 동료작가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희생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문학이 나를 받아주는 한, 나는 그저 쓸 것이다. 그리하여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적 유행은 자주 바뀐다. 내 소설을 읽던 독자들은 언젠가 다른 작가의 책을 읽게 될 것이고 내 소설은 잊을 것이다. 아니, 아예 아무도 소설책이라는 것을 사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생존을 늘 고민한다. 살아있어야 쓸 수 있으니까. 소조님은 이런 발언을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허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거다. 잘 모르는 대상은 공격할 수도 없고 하물며 바꿀 수는 더욱 없다.

할 말은 많지만 그만 써야겠다.몸과 마음이 힘들다. 다만 수많은 고은이들의 건투를 빈다. 영악하게 살아남아 예술이 허락한 기쁨과 고통을 누리시라. 세상이 곧 바뀐다는 풍문에 속지 마시라. 타인의 인정이라는 가혹하고 희귀한 복권에 제 운명을 맡기지 말고 자기 소명을 찾으시라. 그리고 부디 살아들 남으시라. 부디.



덧붙여 : 또다른 고은이가 나오지 않도록 제도의 개선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한 마디 보태고 싶지만 오늘은 힘들어 여기서 그만 접는다. 그러나 한 마디만 할까 한다. 그 어떤 대책이 되든 첫 발걸음은 영화계 혹은 예술계가 어떤 곳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제 내가 참석한 행사의 한 청중이 한때 영화계에 몸담았던 내 동료작가에게 물었다. “그렇게 성공하기 힘든 영화판에 그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려드는 이유가 뭔가요?” 그도 나도,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준비해야한다. 간단한 것은 하나도 없다.


두번째로 덧붙여: 이 글을 기사로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누구든.


세번째로 덧붙여: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이 몇 있는 것 같다. 고작 소조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니 놀랍다. 독해력이 부족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가련하다. 어쩌다 그렇게들 망가졌을까. 그리고 내가 그를 이겨서 뭘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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